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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리는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인가? 죽이는 사람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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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우리는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인가? 죽이는 사람인가?>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쪽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너와 네 집을 불사르리라 하니(사사기 12:1)
우리는 사사기 11장의 말씀을 통해서 사사 입다의 승리와 또 그가 한 서원을 보았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사사 입다에게 그에게 큰 승리를 주었습니다. 입다는 전쟁에 나가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내게 승리를 주신다면 내가 승리한 이후 돌아올 때 나를 맞이한 첫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사람이 딸이 되어버렸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 서원이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서는 사용되어지지 말아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은 하나님 앞에 정해져야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런 본질이 뒤바뀌어서 우리 삶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으로 바뀐다면 그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 입다에게 큰 승리를 허락해주셨지만 또 그 상황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사기 12장의 말씀은 사사 입다가 승리한 이후에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의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1절부터 7절까지 나오게 되구요, 8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입산, 엘론, 압돈이라는 사사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옵니다.
오늘아침에는 사사 입다와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을 보면서 그 에브라임지파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사사 입다가 거두었습니다. 그 승리의 소식을 들은 에브라임지파가 모여서 입다에게 찾아왔다고 합니다. 입다에게 찾아와서 에브라임지파가 하는 말이 뭐냐면, 네가 전쟁에 나갈 때에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보면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그 상황이 기억납니다.
에브라임지파가 이미 한번 누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까? 사사기 8장을 보면 기드온에게 그런 말을 하죠. 기드온이 큰 승리를 한 후에 기드온을 찾아가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 라고 말을 합니다.
기드온은 그런 에브라임의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미안하다고 했죠. 잘 타일렀어요. 그래도 너희들이 우리보다 낫다 하면서 그들을 위로했어요. 그래서 에브라임지파가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을 다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에브라임지파를 향해서 입다가 몹시 화를 냅니다. 그리고 결국은 입다와 에브라임지파가 길르앗사람들과 에브라임 지파사람들이 싸움을 하게 되고 에브라임지파의 4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죽게 됩니다.
왜 에브라임지파는 이렇게 계속 기드온에게도 그랬고 또 사사 입다에게도 그랬고 왜 이런 역할들을 감당할까 라는 생각들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에브라임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해보게 되는데 에브라임 지파는 요셉의 두 아들 중에 한 아들이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요셉지파가 생기지않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지파로 나뉘게 되었죠. 그리고 에브라임지파는 거기에서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나오는 지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에브라임지파는 여호수아 17장 보면 땅 분배를 받을 때, 여호수아에게 우리에게 땅을 더 달라 라고 요구했던 지파였습니다. 나름대로 보면 그 에브라임지파가 갖고 있는 자부심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가족을 이스라엘의 가족을 요셉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구원하셨죠. 애굽에 먼저 요셉을 보내서 야곱가족들을 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가 가졌던 그런 특별함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요셉에게 많은 복을 주셨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도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에브라임지파에게 교만의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그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로 간직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자부심과 교만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왜 그러냐면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들이 계속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사울이 왕이 된 후에 사울과 다윗이 갈등을 하게 됩니다. 그때 에브라임지파는 사울의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 이후에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나뉘게 되는데, 여러보암이 바로 에브라임지파입니다.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인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해서 북이스라엘의 중심이 된 게 에브라임지파가 되고, 또 여러보암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금송아지를 벧엘과 단에 세우게 되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 쭉 읽다보면 예언서를 보게 되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면서 북이스라엘을 상징적으로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에브라임이라고 표현하게 됩니다.
왜 에브라임일까라는 생각을 쭉 해보면, 오늘 사사기에 나와있는 에브라임 지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 속에 흐르고 있는 그들의 어떤 교만함, 그들의 특성이 발견되게 되는 것이죠.
결국은 에브라임지파라는 그 모습을 통해서 작게는 입다와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 기드온과 에브라임지파와의 갈등모습으로 작게 보여 질 수 있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그 에브라임지파와 그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이라는 커다란 관계 속에서도 갈등이 확대되어지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북이스라엘을 앗수르에 의해서 심판하고 멸망하게 하셨다라는거예요.
물론 남유다도 심판을 받고 멸망하긴 했지만 그 북이스라엘 쪽의 핵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에브라임지파였다는 것이죠. 민족적 갈등의 핵심이 되었다는 거죠.
왜 그랬을까? 가장 큰 지파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자신의 지파에 대한 어떤 자부심과 자긍심,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모든 사사시대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나가야지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라는 어떤 교만함이 그들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교만이 있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일을 이렇게 하다보면 어떤 사람은 일이 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일이 되지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데 어느 누구도 일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잘되게 하려는 거 같은데 결론적으로 보게 되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다 보면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서 방향을 가지고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존재와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종종 판단하게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나 본질에서 벗어난 듯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속한 저와 여러분이 속한공동체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저와 여러분이 그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갈등의 핵심이 되느냐? 갈등의 중심에 서느냐? 우리는 잘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교만이라는 거죠.
자신의 목소리가 드러나야 되고 자신의 생각이 인정되어져야 되고,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져야 되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역할과 위치가 자신의 명예가 드러나야 되기를 소망하는. 물론 그 모든 것은 공동체를 위한다 라는 것으로 포장될 때가 참 많이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것이 갈등의 원인이 된다는 거예요. 에브라임지파가 오늘 입다에게 하는 말도 마찬가지예요.
너희만 이스라엘을 위하는 사람들이냐?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같이 가서 싸워서 승리를 해야 되지, 왜 너희들만 가서 승리했느냐라는 것이죠. 왜 그 승리의 자리에 나는 부르지 않았느냐는 거죠? 에브라임 지파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거예요.
에브라임 지파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자신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스라엘을 위해서라고 말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들의 교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교만의 모습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내가 속한 삶의 모든 공동체 안에서 수없이 수없이 드러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인가 아니면 죽이는 사람인가? 모르죠.
문제는 어느 누구도 내 스스로가 갈등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 잘되게 하려고 그랬지 내가 언제 그렇게 하려고 했나 다 말을 해요.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 않게 흐르는 경우가 참 많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자신을 추슬러야 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 앞에서 에브라임지파를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에브라임 지파에게 복을 주셨어요. 요셉을 통해서 복을, 은혜를 주셨어요. 그런데 그 은혜를 받고 복을 받았던 그 지파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명예를 자신의 뜻을 드러내려고 할 때 결국은 갈등이 연출되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입다가 에브라임지파의 42,000명을 다 죽인 것은 정당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이죠.
그러나 적어도 그 에브라임의 그 모습과 행동 속에서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고 생각해볼 때, 그것은 결코 정당한 모습과 정당한 행동은 아니라는 거죠. 우리가 그 모습을 통해서 나도 우리도 에브라임 지파의 자리에 설 수 있다 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침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말씀 앞에 설 때 내 모습은 어떤가 살펴야 되는 것이고, 또 기도하면서 다시 세상의 자리에 삶의 자리에 나갈 때, 나는 공동체를 살리는 사람인가 공동체를 죽이는 사람인가?
나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갈등의 문제를 풀어내는 사람인가?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우리공동체가 살아야하고 우리 가정이 살아야 하고 우리의 삶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우리 심령을 새롭게 해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에브라임지파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한다고, 또 이스라엘을 위한다 라고 에브라임 지파는 생각했겠지만, 하나님, 결국은 그것이 갈등이 되었었고, 또 그들에게 큰 아픔이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가 속한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갈등을 일으키는 자리에 있는지, 갈등을 해소하는 자리에 있는지?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며 공동체를 살리는 자리에 있는지, 공동체를 죽이는 자리에 있는지? 우리자신을 한번 되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셔서,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생각이 공동체를 살리는 그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은혜 허락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부르셨고,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또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의 몫이 있음을 압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가정과 공동체와 사업의 자리, 삶의 모든 자리 가운데, 내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족함 없게 하시고, 참으로 공동체를 세우며 살리는 그 삶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에 일어나고 있는 그 교만의 모든 뿌리들을 잘라버리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배우며, 그리스도를 따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어루만져 주옵시며, 늘 언제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 말씀대로 행하는 그 삶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한 입술을 불쌍히 여겨주옵시고,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연약한 행동들 가운데 성령 하나님 함께 하여 주셔서, 온전히 그리스도의 본을 배우며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믿음의 대를 이어야 할 것이고, 믿음의 본을 보여야할 것이고, 참으로 그들이 믿음의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믿음의 자녀로 세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의 선배들이 해왔던 믿음의 삶의 모습들을 우리가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의 헌신과 그들의 수고와 그들의 열심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렇게 행하게 하시고, 또 우리의 자녀손들에게 그러한 믿음의 대를 이어가며 믿음의 본을 보일 수 있는 우리 ..교회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정 가정을 살려주시고 우리 가정의 모든 자녀들을 하나님, 친히 품어주시며, 어느 곳에 있든지 주의 인도하심과 주의 도우심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로의 문제를위해서, 또 진학문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야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 알지 못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하께 하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옵시고, 그 길을 인도하여 주옵시고, 임마누엘 되신 그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 가운데 친히 동행하여 주셔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에 부족함 없도록 주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성령께서 친히 동행하여 주옵시고 함께하여주옵소서.
오늘 하루의 삶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하나님 동행하여 주옵시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새벽기도회 사사기 12장/ 채효민 목사

2011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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